/ 송성수 부산대 교수·과학기술학
지난 2월 16일 우리나라 가톨릭계의 상징이자 참지식인으로 추앙받았던 김수환 추기경께서 선종하셨다. 김 추기경의 선종은 어떻게 사는 것이 바람직한가는 물론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훌륭한 분은 육체적 생명과 무관하게 지속적으로 교훈을 남기는 모양이다.
김수환 추기경 선종이 남긴 물음
사람은 언제 죽는 것일까? 옛날에는 죽음의 정의가 단순했다. 심장이 멎고 호흡이 멈추고 체온이 싸늘해지면 죽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러한 고전적인 정의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심장 수술을 하려면 심장을 멈추고 인공 심폐기를 돌려야 하는데, 고전적인 정의에 따르면 그것은 사람을 죽이는 행위와 다를 바 없게 된다. 이처럼 의학의 발전은 죽음의 정의도 바꾸고 있다. 심지어 예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죽음도 속속 생겨나고 있다. 뇌사(brain death), 안락사(euthanasia), 존엄사(death with dignity) 등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뇌사는 뇌의 활동이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정지된 상태를 말한다. 의학적으로는 생명을 주관하는 뇌간(숨골)의 기능이 정지되고 이로 인해 모든 반사작용이 없거나 무호흡 증상이 모두 확인될 때 뇌사로 진단한다. 이에 반해 식물인간(vegetative state)은 대뇌피질에 손상을 입어 마치 식물처럼 아무런 움직임도 할 수 없고 의식도 없는 상태이지만, 뇌간이 살아 있어 호흡이나 소화를 비롯한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기능은 유지하고 있다.
안락사는 어떤 사람을 위한다는 목적으로 그의 죽음을 야기하는 행위로 정의된다. 안락사는 동의 여부에 따라 자발적 안락사와 비자발적 안락사로 나뉜다. 전자는 환자의 직접적인 동의가 있을 경우에 환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행위이고, 후자는 환자의 직접적인 동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가족이나 국가의 요구에 의해 환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행위를 일컫는다.
안락사는 또한 죽음에 이르게 하는 수단에 따라 적극적 안락사와 소극적 안락사로 구분된다. 전자는 약물 등을 이용해 어떤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는 행위를 직접 수행하는 것이며, 후자는 어떤 사람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예방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이다.
존엄사는 소극적 안락사와 비슷하지만 맥락이 다르다. 존엄사는 말 그대로 품위 있는 죽음을 말한다. 불치의 환자가 질병의 자연적인 경로에 따라 죽음에 이르게끔 의학적으로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것이다. 안락사가 인위적인 행위에 의한 죽음에 해당한다면, 존엄사는 자연스러운 죽음에 주목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2000년부터 뇌사를 인정하고 있지만, 안락사나 존엄사에 관한 법적·제도적 장치는 구비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고령화 사회가 가시화되고 의료비가 증폭하면서 안락사나 존엄사의 문제는 이제 눈앞의 문제가 되었다. 최근의 전반적인 추세는 죽음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존중하되, 무리하거나 적극적인 방법으로 죽음을 재촉하는 것은 삼가는 방향으로 논의가 진전되고 있다.
유언장 써보면 삶의 의미 다가와
죽음이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이라면 죽음을 의미 있는 과정이자 인생의 완성으로 승화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죽음에 대해 진솔하게 이야기하고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를 미리 준비할 때 안락사나 존엄사에 대한 논쟁은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젊은 사람이지만 여기서 한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내가 죽을 때를 대비해 유언장을 써보자. 나의 재산을 누구에게 나눈다는 유언장이 아니라 내가 어떤 방식으로 죽으면 좋겠다는 유언장 말이다. 그런 유언장을 써보면 지금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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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부산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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