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양성희] 지난 주말 EBS 다큐 '안데스'를 보던 시청자 김경민(46)씨는 자막에 한국 스태프의 이름이 나오자 깜짝 놀랐다. 안데스의 문화와 역사를 세련된 영상과 깊이있는 시각으로 다뤄, 막연히 외국산일 것으로 추측했던 것이다. 방송사 홈페이지에 들어가보니 다른 시청자들의 반응도 뜨거웠다. “NHK나 BBC 다큐 못잖다” “교육용으로 DVD를 사고싶다”는 글이 줄을 이었다.
'한반도의 공룡'에 이어 연타석 홈런을 날리게 된 EBS 김우열 편성기획팀장은 “지난해 PD 20여명이 TF팀을 만들어 한달간 합숙한 성과”라며 “고품격 다큐에 대한 시청자의 요구를 절감했다”고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안데스'와 '한반도의 공룡'은 올 봄 신설된 EBS '다큐 프라임' 시리즈다.
같은 날 밤 방송된 KBS '누들로드', MBC '북극의 눈물'도 이에 못잖았다. 국수를 통한 문명 교류사, 지구온난화라는 소재를 세련된 영상과 깔끔한 연출로 선보였다. 시청률도 높았다. 일요일 밤 10시40분 '북극의 눈물'이 11.4%, 주말드라마와 맞붙은 8시 '누들로드'가 10.5%를 올렸다(AGB닐슨).
고품격 대작 TV 다큐멘터리들이 시청자를 사로잡고 있다. 막대한 제작규모의 대작에, 정치·시사물 일색에서 벗어나 다양한 소재로 승부수를 던졌다. 기획 단계부터 해외 시장을 겨냥하며 '다큐 한류'를 꿈꾸고 있다.
◆고품격 대형 다큐 봇물=이들은 대부분 단발이 아니라 최소 3회 이상 시리즈물이다. 제작기간 1~2년에, 제작비도 각 방송사 최고액을 경신했다. '북극의 눈물'(3부작)이 20억, '한반도의 공룡'(3부작)이 16억이다. 지난해 대작명품 붐을 이끈 KBS '차마고도'(6부작·12억원)보다는 못해도 '누들로드'(6부작) 역시 9억원 짜리다. '안데스'(6부작)는 그나마 2억6000만원으로 낮은 편이다.
풀HD 촬영에, 최첨단 컴퓨터 그래픽 등을 통한 영상미가 탁월하다. '북극의 눈물'은 360도 회전하는 항공전문 촬영장비 시네플렉스로 광활한 북극을 생생하게 담아냈다. 그외 음악(윤상 '누들로드'), 나레이션(안성기 '북극의 눈물') 에도 공들였다.
◆'다큐 한류'를 일으켜라=애초부터 해외 시장을 염두에 둔 국제성·보편성도 특징이다. '차마고도'와 '누들로드'는 KBS의 수출형 다큐 '인사이트 아시아' 시리즈다. '누들로드'는 진행자로 중국계 미국인 켄 홈을 등장시켰다. '인사이트 아시아'를 총괄지휘하는 KBS 김무관 부장은 “해외에서는 진행자나 기획자가 누구냐에 따라 구매가 결정된다”며 “BBC 요리프로 진행자로 유명한 켄 홈의 출연만으로도 판로 개척이 유리하다”고 설명했다. 7일 하이라이트격인 1부 방영에 이어 2~6부를 내년 1~2월 중 방영하는 '누들로드'는 이미 유럽, 중동, 아시아 8개국에 선판매됐다. 올 국제 에미상 다큐 후보에 올랐던 '차마고도'는 18개국에 수출돼 50만불에 육박하는 판매고를 올렸다.
김 부장은 “해외 다큐들이 아직 다루지 않은 빈틈 소재를 찾고, 제작방식 또한 해외 특히 유럽시장을 염두에 두고 제작한다”며 “범아시아적 소재와 접근으로 BBC NHK 못잖은 KBS 브랜드를 만들겠다”고 말했다.
◆탈이념, 탈정치로 다양화=이들의 약진은 다큐계에도 탈이념·탈정치 바람이 불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MBC) '한국사회를 말한다'(KBS) 등 역사 바로잡기, 시사고발류의 정치중심 다큐 일색에서 벗어나 다양화를 꾀하고 있다는 것이다. '북극의 눈물'은 지구 온난화를 소리높여 고발하는 대신 변해가는 북극의 모습을 차분하게 담아냈다. 대형 다큐는 아니지만 시사적인 이슈와 삶의 현장을 찾아가는 KBS '다큐멘터리 3일'도, 72시간의 일상을 담담히 스케치함으로서 뛰어난 일상성과 리얼리티를 확보한다는 평을 받고 있다.
◆다큐 붐, 어떻게 지속할 것인가=시청자의 뜨거운 반응이 아직 광고수익으로 직결되지는 않는 가운데 이런 다큐 열풍을 지속화하는 방안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KBS 김무관 부장은 “BBC의 간판 다큐 '살아있는 지구(Planet Earth)는 제작기간 4년, 제작비 290억원을 들였다”며 “공영성의 상징으로서 다큐에 대한 장기적인 지원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양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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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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