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밍·전략·노력·미적 호소력의 합작품
[노컷뉴스 문수경 기자] 사와야시키 준이치(일본), 바다 하리(모로코), 데니스 강(캐나다)…. 이들의 공통점은 전광석화 같은 카운터 펀치를 구사한다는 것이다. 사와야시키는 지난해 3월 요코하마 대회에서 기습적인 카운터 펀치로 '하드 펀처' 제롬 르 밴너(프랑스)를 무너뜨려 '미스터 카운터'라는 별명을 얻었다. 바다 하리도 그림같은 카운터 펀치로 K-1 역사에 남을 명승부를 수 차례 만들어냈다. 그래서 '악동' 외에 '명승부 제조기'라고도 불린다.
바다 하리는 지난 6일 끝난 K-1 월드그랑프리 파이널 대회 결승전에서 불미스러운 행위로 인해 레미 본야스키에 반칙패를 당했지만 인기는 최고였다.
팬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대회 MVP 투표에서 바다 하리는 72.0%의 득표율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 2위는 에롤 짐머맨(네덜란드, 득표율 13.9%). 또 바다 하리와 에롤 짐머맨이 벌인 준결승은 63.6%의 지지를 얻어 이번 대회 최고 명승부로 꼽혔다. 2위 역시 바다 하리와 피터 아츠의 준준결승전(득표율 25.2%).
두 경기 모두 바다 하리의 카운터 펀치가 빛을 발했다. 바다 하리는 1라운드에서 라이트 카운터로 아츠를 캔버스에 눕혔다. 특히 짐머맨에겐 2라운드 중반 먼저 다운을 빼앗겼지만 종료 직전 날카로운 라이트 훅 카운터를 안면에 꽂아 승부를 원점으로 돌렸다. 그러곤 3라운드에서 번개같은 라이트 스트레이트 크로스 카운터로 짐머맨을 넉아웃시켰다.
그렇다면 바다 하리는 어떻게 가공할 카운터 펀치를 전매특허로 만들었을까.
◈ 타이밍
카운터 펀치는 타이밍의 산물이다. 카운터 펀치를 날리려면 상대의 공격을 살짝 피하면서 그 순간 되받아쳐야 한다. 매혹적인 민첩함을 뽐내는 바다 하리는 대표적인 카운터형 파이터. 그는 197cm의 신장과 긴 리치를 이용해 상대의 공격을 견제하고, 가공할 스피드로 반박자 빠른 카운터를 날린다.
XTM의 김대환 K-1 해설위원은 "바다 하리는 스피드가 월등하기 때문에 상대가 들어오는 순간을 포착해서 재빨리 받아친다. 빠른데다 펀치에 체중까지 실리니까 위력적일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김 위원은 또 "카운터 펀치는 파워보다 스피드가 중요하다. 타이밍만 좋으면 펀치 강도가 그다지 세지 않아도 상대를 얼마든지 쓰러뜨릴 수 있다"고 말했다. 결국 타이밍 싸움에서 승부가 갈리는 것. 일반적으로 스윙 궤적이 큰 훅보다 스트레이트가 더 빠르기 때문에 광속 스트레이트를 주무기로 하는 바다 하리의 카운터가 적중률이 높은 건 당연하다.
또 주먹에 온 힘을 실어 먼저 파고들 경우, 카운터 펀치로 톡 건드려만 줘도 들어올 때의 힘은 되려 선제공격을 한 선수에게 '독'이 되어 돌아간다. 카운터형 파이터는 상대의 힘을 역이용하면 '결정적인 장면'을 연출해낼 가능성이 그만큼 높다.
◈ 전략
2005년 K-1에 입성한 바다 하리는 몸과 경기 스타일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초창기엔 탄탄한 근육을 자랑하는 지금과 달리 아주 마른 체형이었고, 원거리가 아닌 접근전을 펼치며 상대를 압박하곤 했다. 카운터 펀치도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 그러나 2006년 3월 피터 그라함에 3라운드 돌려차기 KO패를 당한 후 마이크 트레이너와 호흡을 맞추면서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았다.
실제로 2006년 12월 '로우킥 스페셜리스트' 폴 슬로윈스키 전부터 확연히 달라진 바다 하리를 볼 수 있다. 킥 위주로 경기를 풀어가던 예전과 달리 이 시합에서 하리는 경쾌한 사이드 스텝을 밟으며 상대의 주무기인 로우킥을 차단했고, 어쩌다 로우킥이 들어와도 거리를 내주지 않고 카운터 펀치로 곧바로 반격했다. 치고 빠지는 아웃복싱 전술은 갈수록 완성도를 더해간다.
김대환 의원은 "바다 하리 같은 경우, 과거에는 상대방이 파고들면 같이 치고받는 '진흙탕 싸움'으로 치닫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마이크 트레이너와 함께 훈련하고 난 후부턴 원거리를 잡고 빠른 카운터 펀치로 승부를 결정짓는 카운터형 파이터로 완성됐다"고 설명했다.
◈ 노력
시각자극에 대한 인간의 최저 반응시간은 0.2초로 알려져 있다. NHK 다큐(The Miracle Body-Reacting : Brain and Body Miracle, 2008년)는 11대 WBC 미니멈급 세계 챔피언 이글 덴 잔라판(필리핀)의 연습 경기 중 반응속도를 측정했다. 그런데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이글이 0.2초보다 더 빠른 0.16초 만에 상대의 공격을 피하고 카운터 펀치를 날린 것.
어떻게 이글은 최저 반응시간의 한계를 뛰어넘었을까. "경기할 때 상대선수의 주먹을 보고 피하면 이미 늦어요. 상대의 움직임에서 타이밍과 리듬을 읽을 수 있으면 어떤 공격도 피할 수 있죠. 그래서 샤워할 때도 물을 맞으면서 눈을 뜨고 있는 걸 훈련해요. 위험 앞에서 눈을 감으려는 본능을 억제하는 거죠. 상대의 주먹을 두려워하면 카운터를 날릴 수 없으니까요."
"하리의 재능은 피터 아츠와 프랑코 시가텍을 합친 것보다 뛰어나다"는 명 트레이너 톰 하링크의 말처럼 바다 하리는 좋은 신체조건에 재능까지 지녔다. 그러나 최고의 카운터형 파이터로 성장한 데는 본인의 노력도 무시못한다. 반응속도를 측정해보진 않았지만 바다 하리가 일류 파이터들 중에서도 가장 빠른 카운터를 내뿜는다는 건 순간순간 엄습해오는 공포와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부단히 연습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김대환 해설위원은 "바다 하리는 맷집이 약해서 한 방 제대로 걸리면 다운도 많이 당한다. 하지만 회복력과 위기관리능력이 좋아서 카운터로 역전 KO승을 종종 이끌어낸다. 물론 단시간에 쌓은 건 아니다. 수많은 실전경험과 승부의 세계에서 생존하려는 본인의 노력이 곁들여져서 가능한 것"이라고 말했다.
◈ 미적 호소력
권투의 매혹은, 거의 죽음 직전까지 가는 고통에서 혹시 가능하다면 그 죽을 뻔한 경험에서 벗어나 결정적인 육체적 우위를 되찾는 상황에서 나온다.(매혹과 열광-어느 인문학자의 스포츠 예찬, 한스 굼브레히트 지음)
2007년 3월 K-1 요코하마대회 바다 하리와 루슬란 카라에프 전은 지금도 팬들에게 회자될 정도로 명승부였다. 2라운드 중반 카라에프는 레프트 훅으로 먼저 다운을 빼앗았다. 그러나 바다 하리는 일어나자마자 라이트 스트레이트 일격으로 카라에프를 실신KO시켰다. 두 선수는 동시에 주먹을 내뿜었다. 전진스텝을 밟으며 먼저 돌진한 카라에프의 레프트 훅은 바다 하리의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바다 하리의 라이트 스트레이트 카운터는 정확히 카라에프의 턱에 꽂혔다.
마치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 두 선수의 팔이 교차하는 찰나, 팬들은 클린히트의 짜릿함을 만끽했다. 패배 직전까지 갔던 바다 하리가 순식간에 카운터 펀치로 역전 KO승을 이끌어냈을 때 관중들은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드라마틱하고 우아한 두 선수의 동작을 본 팬들은 격투기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고 느꼈다.
굼브레히트는 이 책에서 묻는다. "오늘날 많은 스포츠에서 최고의 선수들은 인간능력의 육체적 한계에 근접하는 수준에 도달했다. 팬으로서의 우리의 관심이 더 이상 깨뜨릴 수 없는 양적 기록에 의해서 보단 오히려 선수들의 기량에서 뿜어나오는 미적 호소력에 의해 계속 유지될 수 있을까."
굼브레이트는 이에 대한 해답도 제시해준다. "팬들은 경기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지면 자신의 감정적, 시간적 투자가 전적으로 낭비된다고 여기지 않는다. 패하는 경기를 볼 때보다 적극성과 노력 부족으로 지루하게 전개되는 시합을 관전할 때 더욱 실망한다. 어느 팀도 진짜로 이기려고 하지 않는 경기를 관전하는 것보다 더 끔찍한 것은 없다."
moon034@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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