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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월-E'의 한 장면. |
[영화와 논술]월-E
지하철을 타면 고개를 숙인 채 뭔가에 열중하는 사람들이 자주 눈에 띈다. 그들의 손에는 핸드폰이나 노트북, PMP 같은 각종 디지털 기기들이 쥐어져 있다. 작은 화면 속으로 빨려들 듯 몰두하는 그들을 일컬어 '디지털 유목민'이라 부른다. 프랑스 사회학자 자크 아탈리가 처음 세상에 내놓은 '디지털 유목민(digital nomad)' 개념은 정보통신의 발달로 더는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자유롭게 떠돌게 된 현대인의 일상을 집약적으로 드러낸다.
실제로 요즘 사람들의 생활 패턴을 찬찬히 보고 있으면 유목민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사무실이 따로 없고, 국경이 따로 없다. 이제 세상은 한곳에 정착하지 않아도 누군가와 소통하고 업무를 처리할 수 있는 효율적인 환경으로 변했다. 바야흐로 디지털 시대다.
영화 '월-E'가 상상하는 미래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2810년, 미래의 지구는 쓰레기로 뒤덮인 황폐한 세상. 다행히 인간들은 쓰레기더미에 파묻히지 않고 멋진 우주선에서 안락한 삶을 누리고 있다. 비앤엘사가 운영하는 우주선 엑시엄은 지구청소가 진행되는 동안 인간들이 편안히 쉴 수 있도록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한다. 인간들은 우주선 엑시엄에서 손을 움직이거나 노동을 할 필요가 전혀 없다. 버튼만 누르면 로봇들이 달려와 업무를 모두 해결해주기 때문이다. 안락한 디지털 유목민의 삶이다.
하지만 낙원 같은 우주선에 탑승한 인간들은 왠지 모르게 낯설고 어색하다. 유모차처럼 생긴 이상한 자동차를 타고 음료수를 젖병처럼 물고 다니는 그들은 언뜻 갓난아이를 연상시킨다. 운동을 전혀 하지 않아 몸은 부풀 대로 부풀어 올랐고, 어떤 고민도 하지 않아 머리는 배부른 돼지처럼 미련하다. 세상을 지배한다기보다 누군가에게 사육당하는 느낌이 강하다.
'월-E'는 우주를 떠도는 디지털 유목민과는 반대로, 지구에 정착한 고물로봇 월-E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월-E는 지구폐기물 수거 처리용 로봇(Waste Allocation Load Lifter-Earth-class)의 알파벳 첫 글자를 딴 이름답게 지구의 쓰레기를 청소하며 살아간다. 인간들이 지구를 떠나면서 전원 끄는 걸 잊어버려 홀로 지구에 남게 된 월-E는, 매일 아침 비슷한 시간에 쓰레기 분리수거를 시작하고 저녁 무렵 지친 몸으로 뮤지컬 영화를 보며 휴식을 취하는 소시민 노동자의 삶을 살아간다. 엑시엄의 인간들과는 판이한 삶이다.
영화는 두 개의 삶을 대조적으로 보여준다. 월-E의 세상은 낡고 소박한 아날로그 시대를 상징하고, 엑시엄의 삶은 화려한 디지털 시대를 상징한다. '월-E'의 질문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사람들은 흔히 디지털 세상이 아날로그와는 다른 풍요로운 삶을 약속해줄 거라고 믿지만, '월-E'의 대답은 조금 다르다.
디지털 세상은 정말로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어줄까? '월-E'가 상상하는 디지털 유목민의 삶은 사실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쓰레기더미 속에서 노동자의 삶을 사는 월-E가 오히려 따뜻한 행복을 매 순간 만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감성도 인간보다 훨씬 발달해 있다. 우주선 엑시엄에서 파견된 지구식물 채집 로봇 이브는 월-E의 감성을 증폭시켜주는 캐릭터. 매일 밤 뮤지컬 영화 '헬로, 돌리!'(1969)를 돌려보며 애틋한 사랑을 꿈꿨던 월-E는 이브를 처음 보는 순간, 영화 속 그들의 느낌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게 된다. 그것은 바로 두근거리는 사랑의 감정이다.
이 영화는 로봇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답지 않게 '멜로'에 집중한다. 디스토피아적인 미래에 대한 경고성 메시지 대신 지고지순한 사랑을 향해 뚝심 있게 달려간다. 이 영화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바로 잃어버린 감성의 회복이기 때문이다. 앤드루 스탠턴 감독은 안락하지만, 자칫 무미건조하게 흐를 수 있는 디지털 시대에 인간이 끝까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감성이라고 강조한다. 그중에서도 사랑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한다.
디지털은 인간에게 안락한 미래를 선사해주지만, 알고 보면 치명적인 오류를 안고 있다. 한 번 오작동이 일어나면 걷잡을 수 없는 비극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오래전 스탠리 큐브릭 감독은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에서 기계 의존도가 높은 인류의 삶이 어떤 파국을 몰고 올 수 있는지 경고했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최첨단 우주선 디스커버리호를 타고 미지의 신세계로 향하는 선원들이 컴퓨터인 할의 반란으로 비극적인 사건을 겪게 되는 이야기다. '월-E'는 의도적으로 이 영화의 내용을 적극 차용한다.
금지된 지구 귀환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엑시엄의 선장은 컴퓨터 할을 닮은 로봇의 반란으로 심각한 위험에 처한다. 기계의존도가 높은 엑시엄에서 컴퓨터의 반란은 당연히 생존을 위협하는 치명적인 비극을 몰고 온다.
영화 시작 22분 만에 첫 대사가 등장하는 '월-E'는 디지털 시대의 미래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지구의 주인은 누구이고, 행복의 기준은 과연 무엇일까. 가벼운 사랑 이야기로 포장된 조용한 애니메이션 한 편이 반성 없는 현대인의 삶에 날카로운 채찍을 휘두르고 있다.
※더 생각해볼 문제
①지구의 미래를 상상한 영화를 더 찾아보고, 낙관적인 미래상과 비관적인 미래상을 나누어 정리해보자.
②디지털 시대의 특징은 무엇일까? 영화 속에서 그 특징이 드러나는 구체적인 에피소드를 찾아보자.
③엑시엄의 선장은 왜 낙원처럼 편안한 우주선을 버리고 쓰레기더미로 뒤덮인 지구에 그토록 가고 싶어하는 것일까? 그 이유를 생각해보자.
[황희연 영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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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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