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강인식.김태성] 이상묵(47)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교수는 지난해 3월 “나를 살린 것은 줄기세포가 아닌 IT(정보기술)”란 메시지를 우리 사회에 던졌다. 차량 전복 사고로 전신마비가 된 뒤 IT와 재활 보조공학의 도움으로 강의·연구 현장에 복귀한 이 교수의 모습은 그 자체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2008년 3월 5일자 1, 10면> 그 후 1년. 그가 보여준 희망은 정부를 움직여 장애인들을 세상에 나가게 하는 정책과 사업으로 구체화되고 있다. ※괄호 안은 기자의 설명.
장애인의 날(4월 20일)을 사흘 앞둔 17일. 이 교수의 연구실을 찾았을 때 책상에는 두 잔의 커피가 놓여 있었다. 한 잔은 빨대가 꽂혀 있었다. 누군가 빨대를 입에 넣어줘야만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게 그의 현실이다. 하지만 이 교수의 첫마디는 밝고도 경쾌했다.
“뜬 지 1년이 됐잖아요. 깜짝 놀랄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뜬 지 1년'이라는 것은 '언론에 보도된 후 스타가 됐다'는 의미다. 사람들은 이 교수 앞에서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지만, 대화가 시작되면 그의 장애를 잊게 된다. 그는 뛰어난 말솜씨와 재치로 경직된 분위기를 순식간에 날려버린다.
-어떤 일들이 일어났나요.
“지난해 11월 지식경제부 연구개발(R&D;) 담당 부서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장애인을 위한 기술 개발에 투자하고 싶다는 겁니다. 신문에서 내 이야기를 읽었다고요. 지경부의 연간 R&D; 예산은 40조원에 이릅니다. '스케일이 다른 일이 벌어질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바로 기획에 착수했죠.”
-기획의 내용은 무엇이죠.
“크게 세 가지입니다. 우선 음성인식 프로그램의 완성입니다. 손을 못 쓰거나 알츠하이머 같은 질병에 걸린 이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기술입니다. 그러나 한국어의 음성 정보는 아직 데이터베이스(DB)화하지 못했습니다(이 교수는 영어 음성인식 프로그램을 사용한다). 사업성이 없기 때문에 국가 지원 없이는 불가능하지요. 둘째로는 보조 로봇과 장애인 차량 개발입니다. 이 분야의 석학인 김종배 박사가 함께하고 있습니다. 셋째로는 휴먼웨어(Human ware)입니다. 장애인에 대한 과학 교육입니다.”
김종배(47) 박사는 KAIST 대학원 시절인 1984년 추락 사고로 척수를 다쳤다. 팔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을 제외하면 이 교수와 비슷한 장애를 갖고 있다. 미국 피츠버그대에서 재활공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같은 대학 재활공학연구소에서 일했다. 국립재활원에 재활연구소가 문을 열면서 지난해 고국으로 돌아왔다.
-지경부의 대답은요.
“우리의 아이디어를 모두 사겠다!”(그는 논문심사를 막 통과한 청년 같았다.)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요.
“100억원대 연구개발 사업입니다. 정부에서는 이런 사업을 추진하고 싶어했지만, 그동안 '강력한 엔진'이 없었어요. 내가 '얼굴마담'이 된 거죠(웃음). 언어 전문가, 보조공학 전문가 등이 참여하고 있으니, 거대한 팀이 만들어진 겁니다. 놀랄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또 어떤 거죠?
“전재희 보건복지가족부 장관이 보조공학 분야에 27억원의 예산을 책정해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지경부 프로젝트와 겹치는 건 아닌가요.
“역할이 다르죠. 지경부는 '개발', 복지부는 '보급'입니다.”
이 교수는 서울대 차세대융합기술원 '보조재활공학센터 CARE'의 책임연구원이기도 하다. 송금조 경암교육문화재단 이사장의 기부로 센터가 만들어졌다. CARE는 이번 프로젝트의 본부 격이다.
-'휴먼 웨어'는 어떤 내용인지요.
“똑똑한 장애인 학생은 대부분 문과를 선택합니다. 사법시험에도 도전하죠. 왜냐? 롤(역할) 모델이 있기 때문이죠. 그들에게 과학 분야의 롤 모델을 만들어주고 싶습니다. 인생의 선택지가 많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최소한의 삶의 조건'이 아닌, 정상인처럼 최대한의 삶과 꿈을 향유할 수 있게 말입니다. 프로젝트 이름은 ROPOS(Realizing Our POtential in Science·과학 잠재능력 실현)입니다.”
-단어 대문자를 따면 ROPIS인데, 왜 ROPOS입니까.
-“피스(piss)는 '오줌을 누다'란 뜻이거든요. 이상하잖아요.”(이 교수는 이 말을 하고 '흐허흐허' 웃었다. 그는 호흡할 때 '횡격막'만 사용한다. 그래서 호흡량이 일반인의 40%다. 그래서 웃음도 크게 내뱉지 못한다.)
그런데 이 교수는 “더 큰 기적은 장애인과 관련된 일이 아니다”고 했다. 그는 입김으로 작동하는 마우스를 움직여 컴퓨터 모니터에 구글어스(Google Earth) 화면을 띄웠다. 남극 쪽에서 본 태평양이었다.
“남극 세종기지부터 뉴질랜드까지 태평양을 탐사할 수 있는 쇄빙선이 올 10월 완성됩니다. 6000t급이죠. 국내에서 중앙해령을 공부한 지구물리학자는 내가 유일합니다. 이곳의 탐사와 연구를 맡게 된 겁니다. 내가요.”(2003년 남극 연구에 참여했던 전재규씨가 사망하자, 국내에서는 제대로 된 쇄빙선을 개발해야 한다는 논의가 일었다. 전씨는 서울대에서 지구과학을 전공했다. 이 교수는 “재규가 만들어 놓은 토대 위에서 연구할 수 있게 됐다”고 했다.)
-현장에 가지 못하는 아쉬움이 크겠습니다.
“통신 기술이 발달돼 연구실에서 지휘할 수 있어요. 발견의 과정, 그 속에서의 터프함을 경험하지 못하는 아쉬움은 크죠. 그러나 받아들여야죠. 할 일이 더 있어서 배 탈 시간도 없어요.”
-장애인 관련된 일을 얘기할 때보다 더 신나 보입니다.
“위대한 장애인이나 따뜻한 아버지가 아닌, '뛰어난 과학자'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장애라는 단어를 소거해도 기억할 가치가 있는 연구자.”
-연구는 교수님에게 어떤 의미입니까.
“나를 일으키고 살게 하는 건 잡(job·일)입니다. 60억의 지구인이 동의할 수 있는 과학 이론을 발견해 나가는 과정, 그것을 위해 인생을 건 내기를 하는 거죠.”
- 그것이 아버지 역할보다 중요한가요.
“다친 후, 그러니까 내 육체의 대부분(그는 운동신경과 감각을 '육체'라고 표현했다)을 잃은 후 사회 통념상의 아버지 역할을 대부분 포기했습니다. 주말에 아이들과 놀고, 따뜻한 가장이 되는 것. 남편으로서도···.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가족 모두가 받아들여야 합니다.”
기자는 “아이들을 만지고 싶을 때가 있지 않나”라는 질문을 거둬들였다. '사회 통념상의 아버지'를 버렸다고 했지만, 지난해 이 교수를 만났을 때 그의 책상에 놓여 있던 플레이스테이션을 기자는 기억한다. 아이와 함께 공을 찰 수 없으니까 게임은 해야 한다는 그의 말을 기억한다.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 막내아들(7)이 아빠에게 와 입맞춤하던 모습을 기억한다. 그래서 그 질문은 하지 않기로 했다. 이 교수는 아내와 2남1녀를 두고 있다. 딸(19)이 올해 대학에 들어갔고, 맏아들(16)은 고등학생이다.
글=강인식 기자, 사진=김태성 기자
“연구는 뇌와 심장만으로 충분하다”
4번 척수(목 부분)가 완전 손상됐다는 진단을 받은 후 이상묵 교수는 단 한 번도 '죽은 신경을 살리기 위한 치료'에 매달리지 않았다. 중추 신경은 말초 신경과 달리 한 번 죽으면 다시 살아나지 않는다. 과학적 사실이다. 이 교수는 '나을 가능성이 있는 환자'가 아닌 '불구로 살아야 하는 장애인'이라는 것을 현실로 받아들였다. 대신 '자기 직업으로 돌아가기 위한 재활'에 매달렸다. 입김만으로 작동하는 마우스를 통해 인터넷에 접속하고, 영어 음성 인식 프로그램을 통해 논문을 쓰고 수업을 준비했다.
이 교수는 서울대 해양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MIT-우즈홀 공동박사학위과정에서 학위를 받았다. 2006년 7월 미국 캘리포니아 지질 연구 도중 교통사고로 목뼈(4번 척수)를 심하게 다쳤다. 목 아래 감각과 운동신경을 모두 잃었다. 그러나 2007년, 사고 6개월 만에 강단에 복귀했다.
그는 “안 쓰는 물건을 내다 파는, 개라지 세일(garage sale·창고 세일)을 세게 했다”고 말하곤 한다. “우선순위가 밀리는 팔다리를 정리했고, 정말 필요한 뇌와 심장만으로 충분히 연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구의 생성 과정을 추적하는 것이 그의 일이다. 바다를 통해 지구의 장대한 역사를 캐고 그 비밀을 풀 수 있게 될 때, 이 교수는 뇌와 심장으로 기뻐할 것이다.
지난달 그는 사고 후 재활치료를 받았던 미국의 '랜초 로스 아미고스' 병원을 다시 찾았다. “내가 과연 사람 구실을 하며 살 수 있을까”하며 고뇌에 빠졌던, 병원의 테라스가 눈에 들어왔다. 44세까지 멀쩡한 몸으로 살던 그였다. 모든 걸 한꺼번에 인정하긴 어려웠다. 긴 고민을 거친 끝에 '개라지 세일'이란 농담도 나왔겠구나, 이 교수는 생각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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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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