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2049년 6월 29일자 '동아광장' 칼럼
(글쓴이: 노민선, SAIST 차세대로봇연구센터 전임연구원)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1985년 다나 해러웨이가 '사이보그 선언문'(A Cyborg Manifesto: Science, Technology, and Socialist-Feminism in the Late Twentieth Century)을 발표한지 올해로 64년이 지났다. 동물학자이자 여성학자였던 다나 해러웨이는 이 선언문에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기계와 유기체의 합성인 사이보그'라고 주장한다.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라깡의 표현대로 '최초의 보철인 언어'를 장착한 인간이라는 사이보그는 20세기 후반 비약적으로 발전한 IT시스템과 결합하고, 인간공학적으로 통제되는 노동에 종속되면서 수많은 커뮤니케이션 시스템과 자동화 장치를 몸에 단 '하이테크 사이보그'로 발전하고 있다고 그녀는 예견했다.
20세기 후반 인간은 테크놀로지를 통해 자연과 문화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양육과 본성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 기계와 유기체의 경계를 부정했다.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고 했던가? 경계가 무너진 자리에는 찬란한 기계문명이 꽃을 피웠다. 풍요로운 자연과 창조적인 도시환경과 인간적 가치를 높이는 인간관계가 새롭게 정립됐다.
그 중에서도 로봇과 사이보그는 인간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해 주었다. 자연을 재발명한 인간은 21세기 내내, 로봇과의 공생을 꿈꾸고 기계를 몸 안에 품는 과정을 되풀이하면서 스스로 사이보그로 진화했다.
다나 해러웨이가 '사이보그 선언문'을 출간한 20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비행기 탑승객 중 위험인물을 걸러내기 위해 모든 사람을 금속탐지기에 통과시키는 몰상식한 행동을 범지구적으로 자행했다. 몸에 금속을 부착했거나 소지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잠재적 위험인물로 간주하는 사고는 21세기로 넘어와서도 한동안 계속됐다. 그런 시절에 다나 해러웨이가 쓴 '사이보그 선언문'을 다시 읽어보면, 참으로 미래에 대한 통찰력이 빛나는 에세이가 아니었나 싶다.
그의 주장대로, 인간과 영장류를 구별하고, 인간과 기계를 구별하고, 남자와 여자를 구별하는 대부분의 시도는 헛된 것으로 판명 났다. 그러면서 동물에 대한 차별, 남녀에 대한 차별, 기계에 대한 차별은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 20세기 동물원과 20세기 가부장적 가정을 떠올려 보기만 해도 2049년 오늘의 한반도는 얼마나 달라졌는가?
최근 종종 보도되는 '사이보그 수술 중 사망 소식'들은 사이보그에 대한 인간의 집착이 과도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뇌-기계 인터페이스(Brain-Computer Interface) 기술과 바이오닉스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요즘, 과도한 '기계 대체'로 인해 수술 중 사망하는 사건이 넉 달 사이에 여섯 건이나 발생했다. 신체의 일부를 교체하지 않으면 건강과 생명에 문제가 있는 경우를 넘어서, 인간의 능력을 증진시키려는 무분별한 시도가 그들의 생명을 오히려 훼손하는 것이다.
사이보그 수술이 왜 성행하게 되었을까? 그 해답은 40년 전 성형수술이 횡행했던 연예계에서 찾아볼 수 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성형수술에 대한 사회적 거부감이 매우 강했다. 가슴 수술을 한 여성에 대해서는 색안경을 끼고 봤으며, 코를 높인 여성은 결혼 전에 수술 사실을 남자친구에게 고백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20년도 채 지나지 않아 성형수술에 대한 거부감은 사라졌고, 감기 예방 접종을 하듯 성형수술을 받는 시절이 도래했다.
그 시절 한반도의 연예인들은 같은 병원에서 찍어낸 붕어빵마냥 동질화된 획일 군집이었다. 모든 연예인들은 하나같이 쌍꺼풀을 가지고 있으며, 입술은 콜라겐 주사법을 통해 일정 크기로 도톰했고, 보톡스 주사 덕분에 예순이 다 돼도 눈가엔 주름이 없었다. 마치 평생 한 번도 웃어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그들은 일찌감치 사이보그가 된 집단이었다. 평범한 콧날에 인공보형물인 고어텍스를 채우고, 두 유방엔 실리콘을 삽입하고, 생니를 뽑아 비정상적으로 하얗고 가지런한 임플랜트 치아를 박았다. '인공적인 장치를 통해 자신의 신체적 결함을 극복하거나 인간적 능력을 향상시킨 존재'라는 사이보그의 정의에 비춰본다면, 연예인 집단은 전형적인 사이보그 집단이며, 그들이 출연한 모든 TV 프로그램은 그 자체로 'SF'였다.
그렇다면 가장 개성적이어야 할 연예인들 사이에서 성형수술이 남용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 해답은 미용성형수술의 역사적 기원에서 찾을 수 있다. 역사적으로 코 성형수술이 보편화된 중요한 계기는 19세기 유럽에서 매독이 성행하면서 매독균에 의해 떨어져나간 코를 수술을 통해 다시 되찾게 해준 데에서 비롯된다. 성형수술을 통해 자신이 속한 집단에서 너무 눈에 띄지 않도록 해주었던 것이 그 기원이다. 흔히 성형수술은 '남들보다 눈에 띄게 예뻐지기 위해'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성형수술의 욕망 속에는 다른 구성원과 크게 다르지 않은 외모로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일원이 되고 싶은 욕구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성형수술의 이러한 욕망은 그 속성상 '집단유행'으로 번질 가능성이 농후했던 것이다.
우리는 21세기 초 '성형수술 광풍'과 같은 현상을 '사이보그' 속에서 엿보게 된다. 한때 사이보그에 대한 차별이 심했던 시절이 있었다. 레스토랑에서 자연인과 사이보그가 서로 부등켜 안고 키스라도 할라 치면 혀를 차며 바라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80퍼센트를 기계로 대체한 사이보그들과의 결혼을 자연인들의 부모가 반대하는 일은 사회적인 문제로까지 대두된 적이 있다. 이 때문에 1, 2퍼센트 차이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이보그들이 꽤 많은 것이다.
2041년 가을 서울특별시 강남구에서 벌어진 '사이보그 여성의 수술 거부 사건'은 우리 사회의 단면을 잘 보여주는 사례로 손꼽힌다. 만취 상태로 자동차를 몰다가 인도로 돌진한 차에 받혀 병원에 실려 온 한 여성은 몸의 48퍼센트가 기계로 대체된 사이보그였다. 그의 왼팔과 왼쪽 다리가 골절된 상태였고, 왼쪽 골반도 심하게 부서져 기계로 대체하지 않으면 반신불수가 될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그런데 남자친구의 어머니는 기계대체율이 60퍼센트를 넘으면 결혼을 승낙할 수 없다고 했고, 이 여성은 끝내 수술을 거부하다가 반신불수가 된 소식이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난 오늘날, 이제는 오히려 남들과 차별받지 않기 위해 사이보그 수술을 받고 있다. 마치 연예계라는 집단의 일원이 되기 위해 다른 연예인이 가진 쌍꺼풀과 '높은 코'를 나도 가져야 한다고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불룩 튀어나온 배나 물렁한 어깨를 자신 있게 드러내는 자연인을 나는 거의 본 적이 없다. 사이보그에 대한 편견만큼이나 자연인에 대한 편견은 우리 사회를 더욱 혼란스럽게 할 뿐이며, 인간적 가치를 훼손하는 일이다. 사이보그와 인간 모두, 서로 사랑할 수 있는 평등한 존재들이다.
요즘 중학교 특별시연합 공용어 교과서에 나오고 있는 소설 는 20세기 후반 제작된 영화 를 각색한 것이다. 유전자 조작으로 우수한 유전자를 갖게 된 우성인간과 자연분만으로 태어난 열등인간이 생물학적 계급사회를 이루고 있는 암울한 미래가 이 영화의 배경이다. 한때 성형수술을 받은 우성인간 '연예인'들과 그렇지 않은 '대중'들이 생물학적 계급사회를 만들어갔던 것처럼, 사이보그와 자연인은 기계론적 계급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건 아닐까?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사회적 편견'이 걱정스럽다.
"세상을 보는 맑은 창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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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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